PSYCHO-PASS시리즈에 대한 비평의 장에 대해

전 PSYCHO-PASS 시리즈를 좋아합니다. 근 5년 안에 나온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중에서는 시나리오에 가장 많은 공을 들였고, 한 화 한 화의 템포가 적절하며, 아쉽지 않을 정도의 결말을 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PSYCHO-PASS시리즈에 대한 비평은 중구난방입니다. 생각컨데 그 이유는 팬들 사이에서 '시빌라 시스템은 타협할 수 없는 압제의 표상'이라는 기본적인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은 데 있습니다. 

이 현상이 시빌라의 악함을 더 적극적으로 알아보기 쉽게 어필하지 않은 제작진에게 있다는 것은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실제로 TVA 2기는 시빌라의 진보를 표현하기 위해 카무이를 일개 시스템에 대한 인정욕구로 가득 찬 떼쟁이로 만들어버렸으니까요. 하지만 2기-극장판에서 시빌라의 진보를 보여줌으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시시각각으로 진화하며 민중의 지지를 얻어가는 시스템을 어떻게 무너뜨려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기 위함이지, 결코 '시스템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시스템이 진화해서 보듬어주는 정치과정'을 표현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푸른 문학 시리즈> 중 <마음(こころ)>

개인적으로 이 표지는 별로 안 좋아한다.

'만들어진 지 시간이 지난 후에도 보석같이 푸르게 반짝이는 일본 고전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보자'는 취지의 <푸른 문학 시리즈>는 필자가 꽤 아끼는 TV애니메이션 중 하나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취향에 맞는 작품은 1~4화 분량의 다자이 오사무 원작 <인간실격>과 7~8화 분량의 나쓰메(이상하게도 나쓰메는 꼭 표준일본어 표기법을 지키게 된다)소세키 원작 <마음(こころ)>이다. 인간실격을 좋아하는 건 좋아했던 원작을 23분*4라는 포맷에 맞추어 훌륭하게 재구성했다는 어림짐작할 수 있는 이유지만 <마음>은 좀 더 복합적인 비평의 여지가 존재한다.
원래부터 소설 <마음>은 작품의 화자인 '나'가 '선생님'과 만나 따르게 되는 파트, '나'가 대학교 졸업 이후 고향에 돌아가 병에 걸린 아버지를 걱정하는 파트, '선생님' 이 편지로 '나'에게 자신의 과거사를 고백하는 파트 이렇게 총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작품이다. 푸른 문학 시리즈는 그 중 마지막 편에 수록된 선생님의 유서에 적힌 선생님의 과거사 부분에 두 개의 에피소드를 할애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유서의 주인인 '선생님'의 입장에서 서술된 이야기를 표현한 <마음>이고, 두 번째 에피소드에는 원작을 한 번 비틀어 만든 오리지널로서 또 다른 등장인물인 K의 시점에서 본 이야기를 다룬 <마음 : 겨울>이다.

< 마음>은 나쓰메 소세키 연구자들에게는 에고이즘 소설로 불린다. '선생님'을 포함해 '나'의 아버지도, '오기 대장'도 나에게는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다. 또 이는 '선생님'의 유서에서 묘사된 K의 모습과 완전히 동일하다. <마음>은 이렇게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고독한 인물들을 병치시켜가며, 이런 인물들이 만연한 현대사회(나쓰메 소세키 이 작품을 집필한 때는 급격한 문명화 속에서 인간소외가 부각되던, 이른바 메이지 드림이라 불리던 시기였다)에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마음의 형태에 대해 고찰한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이제 다시 <푸른 문학 시리즈>로 돌아가 <마음>과 <마음 : 겨울>의 관계를 보자. 이 두 에피소드는 비록 원작 소설 <마음>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다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세키가 <마음>에 담으려고 했던 서로 이해하지 않고 이기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인간군상의 모습들을 훌륭하게 재현하고 있다. <마음>과 <마음 : 겨울>은 단순히 같은 사건에서의 다른 인물의 다른 시점을 기계적으로 이동시킨 대립쌍이 아니라, 과거회상에서 인간의 기억이 재구성되는 과정에 대한 깊은 통찰이 배어있는 결과물이다. <마음>과 <마음 : 겨울>에서 표현되는 시간적 배경이 다르고, 주인공이 한 행동이 다르고, 주인공이 입 밖으로 꺼낸 구체적인 대사까지 전부 다르다. 두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이 보는 상대방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나의 순조로운 삶을 파괴하려 드는 절대적 악의 입장에서 묘사된다. 

  이는 실제로 일어난 '객관적인 사건'은 없으며, 모두가(이 경우엔 선생님과 K)자기가 좋을 대로 사건을 재구성하고 자신이 했던 말을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종극에는 사람의 마음까지 제멋대로 판단했다는 통렬한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인집 아가씨가 정말로 좋아했던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더 배신감을 느낀 사람이 누구인지 정량적으로 판단하는 것도 의미없는 일이다. 카를 비롯한 20세기의 위대한 역사학자들이 말했듯이 역사란 역사가의 선택에 따라 재구성되어 후대의 사람은 그것을 진정한 모습이라고 판단하는 것처럼, 우리도 <마음>만을 보았다면 선생님의 입에 의해 묘사된 사건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음 : 겨울>이라는 에피소드는 그러한 우리의 믿음을 지적하며 소세키가 <마음>전체에서 보여준 소통의 부재를 짧고 강렬하게 전달한다. 굳이 아가씨의 입장에서 또 다른 에피소드를 제작하지 않은 이유는 시청자가 아가씨의 에피소드를 일종의 '진짜'로 생각해버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지 않을까?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는 페미니즘 영화인가

*최근 개봉한 샤를리즈 테론과 톰 하디 주연의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이하 매드맥스>를 보고 왔다.. 아래는 다른 곳에 휘발적으로 끄적였던 평의 좀 더 길고 변명이 첨가된 버전이다.*

먼저 확실히 해 두고 싶은 것은 매드맥스가 페미니즘 영화다! 라고 규정한 비평문 중에서 내가 동의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매드맥스에서 표현되는 여성성에서 혹자는 페미니즘적인 메시지를 발견할 수도 있고, 혹자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고 느낄 수도 있으니까. 비평문에 동의하는지 여부는 '평론하는 사람이 어떤 지점에서 페미니즘적인 시각을 읽어냈는지'이지, 페미니즘 영화로 규정했는지 여부가 아니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매드맥스가 훌륭한 이유는 (보통 페미니즘 영화라고 불리는 영화군(群)에서 보이는)페미니즘적 가치주장 비슷한 것을 겉으로 드러나게 삽입하지 않고서도 ‘이건 페미니즘 영화다’라는 반응을 관객들로부터 이끌어냈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매드맥스에서 전통적으로 남성 등장인물에게 부여되던 역할 중 다수는 여성에 의해 수행된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여성성에 대한 감독(혹은 제작진)의 의도가 담긴 것이라기보다 그 세계에선 누구나 살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는 게 당연하고, 그 행동을 하는 사람 중 절반이 여성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인간을 재생산의 수단으로 보는 임모탄 치하의 사회는 특별히 여성에게만 가혹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매드맥스를 본 많은 사람들은 1. 전통적으로 남성 등장인물에게 부여되었던 역할을 여성이 수행하고, 2. 다수가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집단이 남성 중심의 잘못된 사회구조를 타파한다는 이유로 이에 대해 '페미니즘 영화'라는 라벨을 붙이고 싶어한다. 왜? 단순히 여자가 많은 게 우연은 아닐까? 퓨리오사는 우연히 사령관이 되었고, 우연히 탈출할 생각을 한 게 임모탄이 소유한 여자들이라고는 볼 수 없는 걸까? 퓨리오사도 남자고, 부발리니 할머니들이 남자였다면 이 영화는 페미니즘적이지 않게 되어버리는 걸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현상의 원인은 높은 확률로 미디어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 일상적인 페미니즘의 고갈일 것이다. 치우친 것을 정상으로 바라보는 세계에서, 조금이라도 균형에 가까운 표현을 하려는 작품은 주목을 받게 마련이다. 우연히 미디어의 등장인물로 남성을 선택해 온 역사가 누적된 결과 우리(꼭 필자가 말하는 우리가 읽는 당신을 포함시키지는 않는다)인류의 절반을 차지하는 성이 중심인물로 조금 나왔다고 이것을 ‘페미니즘’으로 지각해버리는 것이다. 

  이 현상은 비단 영화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비정상회담에서, 많은 웹툰에서, 수많은 예능프로그램에서 남성은 인류의 1인칭처럼 소비되었고 여성이나 여성의 집단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은 뭔가 기존의 것을 타파하고 여성성을 부각시키려는 시도로 보여졌다. 매드맥스의 이런 지점에 대해 쏟아지는 '페미니즘 영화'라는 평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미디어의 불균형 속에서 위화감을 느끼지 않고 살고 있었는지 자신에게 되물어보게 한다고 본다.  정리하자면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는 등장인물 다수를 여성으로 설정하고 여성이 남성중심의 사회를 타파한다는 구도를 취함으로서 불균형이 만연한 미디어 소비에 일말의 '페미니즘적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영화가 페미니즘적인 색채를 띄는 이유는 그것과는 다른, 좀 더 영화의 서사와 관련된 지점에 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 - 아예 뻔뻔하지도 잘 만들지도 못한 졸작


영화는 실존인물, 미국의 자랑스러운 텍사스 출신 스나이퍼 크리스 카일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모두 큰 성공을 거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메가폰을 잡았다. '전형적인 남부 레드넥 정체성의 소유자였던 크리스 카일은 9.11테러를 계기로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참여하여 스나이퍼로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하지만 전장은 그를 점점 평화로운 사회로부터 유리시켜 미국 본토에서 그는 적응을 힘들어했고 전쟁 중 얻은 PTSD에 의해 파병 후반부에 많은 고생을 겪었다. 하지만 자신과 같은 처지의 전역한 군인들과 함께 지내며 PTSD를 힘겹게 극복해냈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만 결국 한 파병전사에 의해 살해당한다'는 게 이 영화의 시놉시스이다.

시놉시스에 이렇게 적어놓으니 비인간적인 행동을 강요받는 전장 속에서의 개인의 휴머니티 상실과 PTSD에 대해 진지하게 다룬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 크리스 카일의 광적인 국가주의적 성격에 대한 작품 내적인 비판과 점차 심각해지는 PTSD증상에 대한 묘사는 극 중반까지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맨 처음 씬에서 엄마와 아이를 죽이고 고민하는 장면은 물론, 아내의 '몇 명이나 죽였어?'라는 질문, 자신의 작전때문에 일가 전체가 처절하게 처형되는 씬, 본토에 복귀해서도 그를 계속 사로잡는 전장의 포화와 비명소리, 정신과 의사와 상담하며 '나는 전혀 후회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후회라면 더 많은 전우들을 구해내지 못한 것 뿐입니다'라는 대사를 내뱉는 장면 등등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 묘사는 꽤 성공적이었다.

  이 영화가 파병군인의 국가주의 신념과 그가 겪은 사건들 사이의 모순을 냉소적으로 지적하며 관객에게 반전주의적 메시지를 던지는 그런 영화구나~ 라는 만족스러운 감정을 끝장내는 것은 그가 PTSD를 치료하기 위해 전역한 군인들과 함께 지내며 대화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영화의 긴 러닝타임 대부분에 거쳐 심화되던 그의 PTSD는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해결된다. 응당 이런 메세지의 종지부를 찍는 부분인 크리스 카일이 전장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거나, 자신이 살해한 사람들을 상기하는 과정은 단 한 순간도 나오지 않는다. 영화 내에서 PTSD의 치료는 마치 신데마스에서 드링크 빨면 모든 정신상태가 말짱히 돌아오는 것처럼 치료되는 뭐 그런 식으로 묘사된다. 그는 치료(??)과정을 거쳐 다시 평화로운 시기의 레드넥의 모범- 가정에 충실하고 국가에 헌신하는 -으로 복귀하고, 불운한 사고 후에는 훈장으로 뒤덮인 관에 운구되어 많은 사람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난다. 애초 목적으로 보였던 '인간성의 상실'에 대한 비극적 서사는 온데간데없고 남은 것은 단지 한 애국자의 죽음뿐이다. 영화 종반의 어처구니없는 전개는 훌륭했던 전반~중반의 가치를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아주 못마땅한 설계였다.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우스 레드넥 감성 팍팍 넣은 '강하고 가족에 헌신적이며 전우를 위하는 아메리칸 쏠-쟈'에 대한 찬양일변도 노선을 걸었다면 차라리 영화를 잘못 고른 나의 과오를 탓할지언정 병신같은 작품이었다고 욕하진 않았을 것이다. 영화가 이 꼴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클린트 웨스트우드 본인의 정치적 성향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그가 일반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색채를 영화에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결과물도 그럴싸한 경우가 많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의식하고 '중립적인'창작물을 만들려고 해도 자신의 손에서 나온 건 자신의 뇌에 담긴 걸 어느 정도 내포할 수 밖에 없다. 아예 뻔뻔한 노선을 택하지도 못했으면서, 영화를 꿰뚫은 핵심이었고 그랬어야 할 PTSD를 면피 수준의 소재로 끌어내린 이 영화는 의심할 여지 없는 졸작이리라.

덧. 오덕의 친구(칭찬 아니다)리그베다 위키에는 '일각에서는 그냥 미국만세 영화가 아니냐는 비판도 하지만, 영화 자체는 매우 담백하게 있는 그대로의 전쟁터를 묘사하며 어떠한 정치적 색채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크리스도 자식을 둔 부모였고, 그의 대칭점에 있는 주바도 자식을 둔 부모였다. 두 사람은 각자의 신념에 따라 냉혹한 저격수로서 전장에서 만났을 뿐이다.'라고 적혀져 있던데, 선언적인 작품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비평의 폐해라고 본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런 씬이 있다'는 정보나 감독의 인터뷰로는 충분하지 않고, 영화 내에서 그 메시지가 충분히 관객의 뇌리에 각인될 수 있도록 반복적이고 세련되게 묘사되어야 한다. 그리고 메시지와 상충하거나 별 관계없는 내용은 집중을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삭제해야 할 필요성도 있다. 상대 저격수인 무스타파가 가족이 있다는 건 몇 초 나오지도 않는 '이 녀석도 사실은~'수준의 면피용이고, 영화에서 PTSD를 극복하고 가족들과 짝짜꿍하며 잘 사는 크리스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파병군인이라는 크리스의 영웅적 인간상을 더욱 부각시켰을 뿐이다.

비평의 대상

모처의 카페에 적었던 글을 거의 수정없이 게재

입덕(...)을 한 이래로 뭔가 있어보이는 작품을 여러 개 봐 왔지만, 그 작품들에 대해 뭔가 의미있는 비평을 하거나 독특한 감상을 내놓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제가 보는 작품이 제 가치를 결정한다고 생각해서 '나는 이런 개마이너한 애니도 봤다'는 일종의 허세의 용도로만 사용할 뿐이었죠. 뭐 나름의 시행착오를 거치는 것도 좋겠습니다만, 적어도 여러분이 보는 작품이 힙스터의 허세에서 끝나지 않기 위한 가이드가 있으면 더 좋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또 비평같은 복잡한 개념에 관심이 없었던 회원에게는 일종의 자극제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 봤네요. 동아리에서 3년 넘게 지낸 지금도 선배들에 비하면 발톱의 때를 청소하는 트리머에 낀 때 수준이지만, 그래도 그 뭔가 있어보이는 작품에 대한 느낌을 피력하기 위해 이리저리 구르다 보니 적어도 무엇이 비평이고 비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 것 같거든요.
소비종속적인 종족인 오타쿠가 작품을 보고 뭔가 대단한 감상을 말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동시에 어떤 작품을 봐야 할지, 또 뭘 말해야 할지 아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이 글은 제가 여기저기 구르면서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비평에 관한 기본적인 규칙들을 공유할 목적으로 씌여졌습니다.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 또한 좋습니다. 비평같은 복잡한 개념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이제부터라도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비평이 뭐냐? 라는 간단한 질문에서 시작해봅시다. 비평은 단순 감상과 구별되며, 또 단순 해설과도 구별됩니다. 비평과 단순 감상을 가르는 가장 주요한 차이는 비평에는 감상을 내놓게 된 근거가 반드시 따라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근거는 완전히 객관적이지는 않으며 다른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판단의 근거로서 기능하기 위해 어느 정도 타당함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예)
A : <FREE!>는 개망작이다 <- 감상입니다

B : <FREE!>는 종반부에 캐릭터 사이의 균형을 심각하게 깨뜨리며 무리한 결말을 시도한 개망작이다 <- 비평입니다. 근거는 '<FREE!>가 종반부에~' 부분이 되겠죠.


  비평은 남에게 보이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일렁였던 물결을 어느 정도 합리화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가 필요합니다. 근거가 설득력있으면 많은 사람에게 받아들여지는 비평이 되겠고, 얼토당토않으면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겠죠. 물론 노관심=나쁜 비평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요.


  두 번째로, 비평은 비평하는 사람의 미적 가치론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모든 비평은 싫었다/그저그랬다/좋았다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작품을 보고 이 세 바구니 중 하나에 던져놓기 위해서는 어떤 바구니에는 어떤 것을 담는다라는 기준이 있어야겠죠. 결국 비평을 한다는 것은 작품을 분류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미적 가치를 드러내게 됩니다. 평가를 하기 위해 평가기준을 고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여기서 도출되는 당연한 결과는 비평은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겁니다.모든 사람이 자신의 미적 가치에 동의할 수는 없으니까요. 다만 비평가는 항상 자신의 미적 가치를 인식하고 그 가치에 맞추어 작품을 재단했음을 보여야 합니다.

예)
A :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는 오타쿠들의 말초신경만을 건드리는 존재론적으로 하등한 요소들만을 모아놓고 서사의 시대를 종식시킨 쓰레기이다.

B :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는 서사라는 주박에서 벗어나 '캐릭터 소설', '캐릭터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확고히 보여준 21세기 우주명작이다.


A와 B가 가지고 있는 미적 가치가 다르기는 하지만 둘 다 작품을 분석하고(이 경우엔 '서사를 제거하고 캐릭터성을 극대화했다'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 근거) 자신의 미적 가치에 비추어보았으므로 모두 비평으로서 성립합니다. 물론 어느 비평이 더 타당한지는 A와 B가 3박4일 피터지게 싸우며 결론을 내야겠지만 이 부분은 뒤에서 더 다루겠습니다.


  흔히 비평의 3요소는 '묘사, 분석, 평가'라고 합니다. 비평은 이 세 요소를 모두 포함해야 하며 세 요소의 균형이 깨질수록 비평문으로서의 가치는 떨어지게 되지요. 묘사는 말 그대로 자신의 감상의 원천이 된 작품의 일부, 예를 들어 소설에서는 문장, 회화에서는 이미지, 영화에서는 씬에 대해 표현하는 과정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비평을 시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소홀하기 쉬운 부분이 이 묘사인데 기본적으로 비평하는 사람은 그 작품을 이미 봤기 때문에 다시 글로 자신이 본 내용을 풀어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평문을 보는 사람 중 모두가 그 작품을 보지 않았을 수도 있고 봤더라도 비평가가 말하는 부분이 정확히 어디인지 종잡을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비평가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 대체 어디인지 꼭, 꼭 먼저 묘사해야 합니다.


  묘사를 했다손 치더라도 감정의 원인이 된 부분에 대한 분석 없이 그냥 넘어가는 것은 거대한 수박의 껍질을 핥다가 짠 맛이 나서 수박이 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모든 예술작품에 껍데기 안쪽의 그 어떤 것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만 적어도 비평을 하려면 껍데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껍데기의 조합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분석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분석의 과정까지 마쳤으면 이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평가를 할 차례입니다. 분석의 결과는 실로 다양합니다. 의도는 좋았으나 결과물이 구릴 가능성도 있고, 너무 구려서 분석할 가치를 못 느낀다고 확신할 수도 있고, 너무 난해하여 오히려 감상을 방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앞에서 강조했듯 비평은 단순한 작품해설과는 다르며 비평가의 감정을 포함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비평가는 분석의 결과 작품의 부분(혹은 전체가)이 잘 조형되었는지, 표현은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를 잘 전달하는지, 조형의 결과가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일관적으로 서술해야 합니다. 단순한 사실과 분석의 나열은 잘 조직된 비평문으로서 기능하지 않습니다.

예)
A : 오시이 마모루의 <GHOST IN THE SHELL>은 인간 실존에 대한 철학적 의문을 드러낸다. 하지만 감독이 작품에 사용한 표현방법은 너무 설교적이고 수다스럽기 때분에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B : 오시이 마모루의 작품 <GHOST IN THE SHELL>의 주인공 쿠사나기 모토코는 자아를 가진 이래 살아있는 육체를 가져 본 적이 없는 자신의 영혼 - 고스트 - 이 갖는 의미를 지속적으로 고민한다. 이러한 모토코의 고민과 끊임없는 불안은 <GHOST IN THE SHELL>을 명작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C : <GHOST IN THE SHELL>의 주인공 쿠사나기 모토코는 결국 인형사와 결합함으로서 육체에 구속된 영혼 - 고스트 - 를 가진 인간에서 벗어나 네트워크 그 자체에 존재하는 신인류로 재탄생한다. 이것은 미래사회가 잉태하고 있는 포스트휴먼적 정체성에 대한 오시이 마모루 나름의 답이라고 볼 수 있다.


위 세 가지 예시가 각각 어떤 요소를 결핍하고 있는지 눈치채셨나요? A는 <GHOST IN THE SHELL>이라는 작품의 어떤 부분이 '실존에 대한 철학적 의문을 드러낸다'는 분석을 불러냈는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B는 작품의 특징이 왜 그런 평가로 이어지는지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있고요. C는 사실의 나열과 분석만이 존재할 뿐 비평가의 평가는 전혀 들어가있지 않습니다. 셋 다 어쨌든 비평문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만 균형이 무너지면 글 전체의 가치는 떨어집니다.


  지금까지 비평이 무엇인지, 또 비평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 대충 살펴본 거 같습니다. 요약하자면
1. 비평은 단순한 감상과 다르며, 비교적 객관적인 감정의 근거를 갖춰야 한다.
2. 비평에는 반드시 비평가가 가지고 있는 미적 가치가 드러나야 한다.
3. 비평은 묘사, 분석, 평가라는 비평의 3요소를 모두 포함해야 한다.

정도가 되겠네요. 


글을 쓴 후 모 님이 달아준 댓글도 참고하면 좋을 거 같아 첨부. 저작권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이걸 발견하면 밥 한 번 더 사달라고 하세요(?)


  비평이나 감상이나 결국은 작품이라는 대상에 대한 미적 판단의 일종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미적 판단이나 그 근거들을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저는 비평과 감상을 가르는 주요한 차이로서 미적 판단의 방향성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감상은 작품이라는 대상에 대해서 개인적 의식 내에 존재하는 미적 감관의 반응으로서 환기되는 관념에 기초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을 언어 등의 수단을 이용해 직관의 영역으로 형 변환시켜 나타낸 것이 바로 감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환기되는 관념이라는 것은 이성판단의 영역이 아닐뿐더러 개별자에 해당하므로 어떠한 보편자로써 표상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감상이라도 작품을 보고 환기되는 그 관념 자체를 전달할 수는 없으며 자칫하다가는 직관의 영역으로 형 변환된 원관념이 독자들의 내재화과정을 통해 다시 형 변환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변형이 일어나 감상의 혼란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오직 감상을 읽은 독자들이 자신이 느낀 것과 비슷한 내적 관념들을 연상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감상의 궁극의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비평은 감상과는 반대로 직관의 영역에 기초하여 작품을 보고 환기되어지는 관념을 분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상이 기초하는 관념이 개인적 의식 내의 것이었다면 비평은 어떠한 형태의 보편적 개념을 상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작품에 대해 논의(보편적 개념이 상정되지 않는 경우에는 논의가 아닌 논쟁이 이루어지게 됩니다.)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문예이론이나 미학이론에서 다루어지는 수많은 개념들이 바로 이 보편적 개념의 예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별적 미적 판단이라는 이념은 직관을 통해서 표상되지 않으므로 사실 엄밀히 말하면 여기서 보편적 개념은 실재적 직관이라기보다는 상징적 직관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어찌되었건 비평은 감성을 직관의 영역으로 이해하고 이에 따른 이성판단의 작업이 이루어지므로 다분히 관념적인 감상과는 확연히 다른 특징을 띠고 있습니다.
  요컨대 결국 감상은 작품을 보고 환기되는 개별적 관념이라는 특수를 직관이라는 보편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표현하는 반성적 판단력이 작용하는 것이고 비평은 미학이론, 원리, 규칙 등 보편에 근거하여 특수를 보편 아래 포섭하는 규정적 판단력의 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감상과 비평 모두 미적 체험을 근거로 쓰여 지지만 미적 체험이라는 것의 궁극은 어떠한 개념으로 도식화 될 수 있는 직관이 아니라 관념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보편 개념에 근거하는 비평이나 남에게 전달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직관의 형태로 형 변형되는 감상 모두 어느 정도 한계를 물론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감성적 직관을 통해 상상력을 매개하고 도식작용을 거쳐 대상을 규정해버리는 비평보다는 감상이 작품의 본질을 전달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직접 보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또한 비평이라는 목적이 개입된 상태에서의 작품의 해제는 다분히 미적 체험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작품의 논의와 같은 규정적 작업을 위해서는 비평 또한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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